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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인생38

암밍아웃, 새로운 다짐의 시간들! 2016년 7월 초, 받았다. 암 선고를 처음에는 당뇨인 줄 알았다. 당 수치가 300을 넘고 몸이 침대로 파고 들어, 일어나는 것 자체가 힘들었었다. 그리곤 암 덩어리가 혈관을 막아 혈전이 생겨 요도를 막았다. 2016년 7월의 하늘은 너무나도 파랬다. 눈이 부시도록 파랬다. 암선고 직후 나는 아라뱃길의 바다 줄기로 차를 몰았다. 한없이 푸르른 나무잎과 더없이 파란 하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구나 했다. 당시 내 나이 44세였다. 큰아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아직 둘째, 셋째의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였다. 나의 아내는 늘 분주하고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순수한 사람이였다. 물론 지금도...... 이제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인생에 대한 서러움도 원망도 .. 2024. 2. 26.
나의 첫차, 슈퍼티코 나의 첫차는 1996년 슈퍼티코이다. 94년도에 운전면허를 따고 군에 입대했다. 의경으로 입대해서 방범순찰대 생활 1년을 하고, 운전대기실에 발령받았었다. 병장 때까지 서장님 차를 운전하는 운전병이었다. 아, 의경이니 수경 때까지다. 군에서 운전을 배웠다. 스틱 자동차를 오토처럼 몰아야 했다. 의도치 않게 서장님을 깽깽발로 차를 타게 만들었던 웃픈 기억들도 있었다. 군대생활은 각설하고, 운전병으로 제대하고 보니 2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걸어 다니는 게 불편했다. 당시 살던 곳은 부천 춘의동이었다. 춘의동에서 도당동까지 어머니 직장에 모셔다 드리기 위해 차를 구입했다. 바로 티코, 중에 슈퍼 티코이다.나의 첫차, 슈퍼티코!! 물론 군대에서 서장님 차를 몰 때는 프린스도 몰았었고 엑센트, 프레스토, 1,5톤.. 2024. 2. 23.
크리스탈 드디어 미국에 가나?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다. 나는 아이가 3명이 있다. 그 아이들이 커서 모두 어른이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 큰 아들은 무언가 부모와 맞지 않는지, 아니 정확히는 나와 맞지 않는지 분가를 했다. 둘째는 나의 페르소나는 대학을 휴학 중이다. 셋째 귀여운 우리 막내는 열심히 알바를 하고 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고맙고 또 감사하다. 막내아들은 요즘 뚜*레주*에서 샌드위치도 만들고 파트타임 알바에 여념이 없다. 최근에는 토익을 공부한다며 3시간 공부 인증을 하기도 한다. 엄마가 토익 점수에 용돈을 걸었나 보다. 먼저 자란 형과 누나 덕에 우리 막내아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스스로 공부하며 2023학년도에 서울에 있는 숭실대에 입학했다.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긴 막내 아들이 그렇게 대견할 .. 2024. 2. 22.
아빠의 어린시절 1980년 국민학교 1학년때이다. 우리 동네에는 탱크와 낙하산 타는 군인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군부대 때문에 생긴 동네일 수도 있겠다.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은 새마을이였다. 옆동네는 개미마을이였다. 또한 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5번 종점, 574 종점, 812 종점 등으로 불리었다. 5번은 성남가는 버스 였다. 574는 동대문까지 가는 버스였다. 812는 종합운동장까지 가는 버스였다. 지금은 송파상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버스회사 이름이 수도교통에서 바뀌었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가끔 571번 버스를 타고 천호동으로 놀러 나갔다. 당시 국민학교 때에는 천호동에 현재 현대백화점 자리에 유니버스 백화점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버스타고 다른 동네에 나가서 놀았던 기억이 잊혀지.. 2024. 2. 7.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46년생이시다. 내일이 생신이시니 올해 77세 되셨다. 1946년은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가장 평화로운 해였다고 한다.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당시에는 10남매도 흔한 시대였다고 전해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민학교 시절 미아리 외가집에서 보내던 생각이 난다. 방학이였나보다. 어머니 8남매 중 막내 삼촌이 나와 두 살 터울이여서 함께 지내던 기억이 있다. 막내 외삼촌은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싸움 잘하던 동네 형같은 막내 삼촌이였다.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 형같은 삼촌이다. 30후반 40초반에는 주위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려고 노력했고, 또 만나고 했다. 떨어져 지내던 사촌 형제들도 봤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불편한 관계가 싫어서 인지 잘 안보게 된다. 부평에는 할머니 추어탕이 있.. 2023. 12. 11.
아버지의 첫 슬기로운 직장생활 이야기(3) 외동아들의 첫 직장생활로 집안에서의 위상도 급격히 변해있었다. 큰아들의 돌도 지나기 전에 취업해 사회생활을 해야했던 아내는 슬슬 회사생활을 접을 준비를 했다. 함께 살던 부모님도 슬슬 내 눈치를 보시며 아들 밥상을 차려주라는 무언의 압력을 아내에게 주셨다. 당시 인천에 살던 나는 강남까지 가는 인강여객버스를 애용했다. 거의 매일 회식자리이다 보니,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오르면 배가 끊어오르던 적이 빈번했다. 한 번은 올림픽대로 한가운데 버스를 세우고 볼 일을 보러 뛰어간 적이 있다. 그때 같이 탑승했던 만원버스의 시민들에게 뒤늦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그래도 출근길은 항상 즐거웠으며, 회사생활은 내 책임감을 만족시켜주는 유일한 공간이였다. 당시 29살이였던 나는 아침밥상을 받는 것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기.. 2023.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