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군대생활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보통 늦게 피는 기수는 20개월하고도 힘든 경우가 많은데, 15개월정도 군생활을 하니 고참급에 들어갔다. 그리고 운명의 보직변경이 되었다. 군입대전 면허증을 따고 입대한 것이 도움이 되어 방범순찰대에서 본경찰서 경리계 소속 의경으로 배치되었다. 직무는 경찰간부 운전병이였다. 군인임에도 사복을 입고 활동할 수 있었다. 물론 최종 목표는 1호차 운전을 꿈꿨다. 당시 1호차를 운전하던 김 길홍 수경님이 너무 멋있었다. 혹 이 책을 보시면 육 영수 수경님하고 같이 연락주시면 너무 반가울 것 같다. 또한 군대생활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곧 이야기할 내가 아버지가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결혼을 군대시절 했던 것이였다. 복중에는 이미 큰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고참때 송파구청에서 조촐히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가 더 배가 불러오기 전에 말이다. 결혼식 사진에는 중대원들이 가득하다. 뒷풀이도 여느 결혼식보다 더 박력있는 뒷풀이를 했다. 이쯤되면 잊지 못할 군대생활이였고, 감히 흥미진진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시절의 얼차려나 기합은 그저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남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6.25를 정신을 계승한 백골부대와 아버지가 된 나의 군대생활을 뒤로한 채, 어느덧 당시 복중의 아들이 군대를 입대했고, 이제 제대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 되었다. 순식간에 타임슬립이 일어난 기분이다. 60년대부터 2018년까지 군대생활만으로도 남자들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였다. 큰아들이 입대할 당시 아이들은 자원 현역 입영이 불가능 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장교로 군대를 가야한다를 나는 큰아들에게 주입하고 ROTC 시험을 볼 것을 무작정 강권했다. 내 앞에서는 알겠습니다를 외치던 녀석이 끝내 면접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장교로 임관을 포기했다. 나는 왜 안갔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장교생활의 비젼을 보여주기 위해 세종에서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촌에게 데려가 이런저런 얘기로 동기부여를 해주기도 했다. 판단은 자기자신만이 할 수 있는 법. 녀석은 면접포기로 나에게 처음으로 반항, 아니 반기를 들었다. 20년 그 녀석 인생에 첫 반항이였다. 흔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사춘기때도 반항 한 번 안한 녀석이였다. 묻지 않았다. 성인이 된 녀석의 결정이니. 현역입대가 사실상 불가능하니 해군으로 지원을 한 큰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자기의 인생을 책임질 줄 아는 선택이였으니 당연한 것이였다.
해군 입대식에 온 가족이 참석했다. 진해는 해군의 도시였다. 모든 것이 군에 맞춰져 있는 인상을 받았다. 사제 밥을 마지막으로 먹던 고기집에는 같이 입대하는 장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날, 가을 하늘은 너무나 청명하다 못해. 구름 한 점 없는 알프스 호수같은 하늘이였다. 많은 인원들이 연병장에 모여, 숙소도 보고 주변 부대시설을 둘러보는 시간을 주었다. 내가 입대하던 시절하고는 사뭇 다른 풍경이였다. 얼마전 종영항 TV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를 촬영한 내무반과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군대는 안전할 것이며, 부모님들이 아드님들을 믿고 맡겨주셔서 나라가 평안함니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방송해 댔다. 군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생각되었다. 지금은 말년 병장인 아들이 말하길 후임병한테 공식적으론 반말과 명령을 못하게 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국방부 차원에서 그런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새삼 대한민국 군대가 왜 그러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조직으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 인데, 마치 공무원생활 비슷하게 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 입소식으로 돌아와, 식순에는 지역에서 유명한 걸그룹이 나와 몇곡의 댄스음악을 부르고 흥을 돋은 후 내려갔다. 다음 순서는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식순이 있었다.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어버이 은혜가 연주되었다. 눈앞이 파도가 쳤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썬글라스 안에 감추었다. 이렇게 눈물이 날지는 상상도 못했다. 오만가지 복잡한 심경이 들어 입소식이 끝날 때까지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그렇게 큰아들의 입대를 지켜보았다. 나는 또 한번 성숙해졌다. 아니 성숙한 아버지로 다시 한단계 올라섰다. 그날의 푸르름이 내가 아버지라는 것을 다시한번 일깨워 줬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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