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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인생

아빠의 어린시절

by 에듀필라서퍼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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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국민학교 1학년때이다. 우리 동네에는 탱크와 낙하산 타는 군인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군부대 때문에 생긴 동네일 수도 있겠다.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은 새마을이였다. 옆동네는 개미마을이였다. 또한 버스 종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5번 종점, 574 종점, 812 종점 등으로 불리었다. 5번은 성남가는 버스 였다. 574는 동대문까지 가는 버스였다. 812는 종합운동장까지 가는 버스였다. 지금은 송파상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버스회사 이름이 수도교통에서 바뀌었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가끔 571번 버스를 타고 천호동으로 놀러 나갔다. 당시 국민학교 때에는 천호동에 현재 현대백화점 자리에 유니버스 백화점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버스타고 다른 동네에 나가서 놀았던 기억이 잊혀지질 않는다. 당시 동네 형들하고 운동화를 몰래 가져오는 나쁜 행동을 하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나이키가 최상이였고, 아디다스 운동화등도 선망의 대상이였다. 나는 늘 슈퍼카미트라는 운동화를 신었었다. 그리고 가방은 쓰리세븐 책가방이었다. 

당시 내가 탔던 그 버스 모델이다.
쓰리세븐 책가방

거여동은 당시만 해도 논이 많았다. 80년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나는 서울을 기반으로 한 MBC 청룡의 팬이 되었다. 지금와서 보니 OB 베어즈 팬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늘 동네에서 형들과 논으로 야구를 하러 다녔다. 너무 재미있었다. 야구를 하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포수를 보다가 야구방망이로 배를 맞아, 늑막염이 걸렸던 것이 가장 큰 부상이였다. 너무 어려서 인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엄마가 해주시는 한약을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서흥한약방이 유명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서흥 한약방이 거여 초등학교 옆에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면 최소 40년은 된 한약방이다.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자란 탓에 어린 시절 형제가 있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형이 없이 지내다가 가끔 미아리에서 방학을 보내러 온 막내외삼촌이 형 노릇을 동네에서 해 주었다. 나보다 3살 많은 막내외삼촌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다. 야구와 더불어 재미있게 했던 짬뽕 놀이가 있다. 고무공으로 야구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당시 막내삼촌은 홈런도 많이 치고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였다. 그리고 믿음직한 빽이였다. 삼촌이 서라벌고를 중퇴할 때까지 늘 나의 우상이였다. 종국엔 안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는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큰 편이였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동네 대장 노릇도 하고 우리 어린 시절엔 코 흘리면 싸움도 많이 했었다. 옆동네 개미마을 아이들과 야구를 하면서도 논에서 어린 마음에 다툼이 많았던 것 같다. 국민학교 5학년때는 무밭에서 무 서리를 하다가 붙잡혔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무에 묶여 있었던 기억 말이다. 영화처럼 국민학교 5학년짜리를 무하나 서리했다고 나무에 묶어 두었던 당시 무밭 주인이 지금도 원망스럽기 그지 없다. 당시에 울지 않으려고 애썻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는 늘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맞벌이를 하셨다. 늘 집에는 나 혼자였던 기억이다. 그 시절 어두워 질때까지 동네에서 뛰어놀던 그립던 내 고향, 거여동을 지금도 가보곤 한다. 향수에 젖어 거닐어 보면 그렇게 커다랗던 내 고향이 너무나 작아져있어 놀라울 뿐이다. 그 골목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다만 집들이 신식으로 바뀐 정도이다. 어릴때 있었던 백광세탁소는 아직도 그대로인게 신기하다. 어릴 적에 전두환 별장이라 불리우던 캐슬렉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내려다 보는 나의 고향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여전히 거여동, 마천동을 갈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골프장이였다. 아직도 그리운 그시절, 라운드를 다시 가게 되면 또다시 그리웠던 동네를 한바퀴 돌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