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1980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가지고 있는 입학사진은 칼라사진이었고, 가슴에는 손수건을 옷핀으로 부착했다. 내 얼굴은 엄청 일그러져 있었다. 어머니가 눈꼽을 뗀다면 침 바른 손으로 눈을 찌르셨다. 얼굴이 빨개져서 울고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당시 한 반의 인원은 60~65명 정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에 등교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외자식이 귀한 시기였고, 기본이 두 명, 많게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있던 시기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500원 주화를 없는 형편에 억지로 샀던 기억이 난다. 바로 5공화국 출범 주화였다. 어린 시절 너무나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장롱속에 보물처럼 넣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로 물들었던 그날의 대한민국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새롭게 출범한 군부독재는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프로야구 출범(1980년), 프로축구 출범(1982년), 농구대잔치 출범(1983년)이 줄을 지었다. 프로야구 출범 배경을 두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생 후 전두환 정권이 정치적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시작한 3S(screen, sex. sports)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성숙한 시민의식은 즐기는 것은 즐기줄 알았고 정치는 정치였다.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의 개헌을 이뤄낸 것이다. 이날의 기록들은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왔는데, 이런 학습효과 덕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촛불이라는 혁명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당시의 성적표를 모두 보관하고 있던 나는 수, 우, 미, 양, 가로 평가 받던 시기였다. 공부를 잘하면 절대 권력이었던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고, 그렇치않은 경우에는 핀잔을 받기 일쑤였던 시기이다. 잘 사는 집 공부 잘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콧물 흘리며 가난해도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 세대의 부모님들은 소위 똥꼬가 찢어질 정도의 가난을 경험했던 세대이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커서 펜대 굴리면서 살아야 한다’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님들은 나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대학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펜대 굴리면 직장생활 하시기를 바라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소원이시기도 했다. 왜냐하면 학력이 짧았던 부모님을 시키는 사람들은 대학을 나오고 편하게 펜대만 굴리며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였음을 중학교 시절 깨달을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처음으로 반등수, 전교등수가 나오는 경쟁의 첫 사회였다.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며 알파벳을 익히고 산수도 수학으로 바뀌었다. 머리도 빡빡 밀었던 사립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개천이 있었다. 그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을 학교 선생님들께 많이 들었다. 부모님 모두 노동자이다 보니, 내가 진학하고 싶은 학교도 지금으로 따지면 실업계학교였다. 수도공고, 서울기계공고, 덕수상고 등도 지원이 가능했고 실제로 연합고사 점수가 상당히 높아야만 붙을 수 있는 명문고등학교였다. 전통의 명문학교이니 지금도 당연히 명문학교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이때 힘든 결정을 하셨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실업계 학교로 진학을 원하지 않으셨고, 급기야 살 던 주소를 8학군으로 옮기시는 실행을 하셨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연합고사 점수가 200점 만점에 만점을 기대했던 주위의 시선과 다르게 180점을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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