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인생38 길을 잃은 40대 아버지들과 자식이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의 도래(1) 1996년 김정현 작가님의 장편소설 ‘아버지’가 세상에 나왔다. 문화재청 관리인 한정수 사무관은 지방의 대학교를 나오고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유명해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는 직장에서의 한계와 가족들과의 단절이다. 특히 대학생이라 머리가 커진 딸 지원은 아버지를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혹독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친구 남 박사에게서 췌장암에 걸렸다는 그래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 벌어진다. 정수는 "내가 손발을 안 씻어서 그런 거냐"면서 괴로워하지만, 입원하여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를 안 가족들은 마음은 괴로웠지만, 경주 보문단지 가족여행 등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동참한다. 특히 아내 영신은 남편의 애인이자 요정 아.. 2023. 11. 5.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못 살수 있다던데(3) 아이들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첫째가 중학교 2학년이 되는 시기에 함께 청계산을 등반한 적이 있다.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우리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칭을 사용한다) 옛날에 노비로 태어났으면 어쨌을까 싶어요!” 웃으며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였을지 모르겠지만 난 최대한 진지모드로 되물었다. “건우야, 지금 현재에도 계급이 있는 것 같니, 없는 것 같니?” 큰 아들의 대답은 있는 것 같단다. 내 생각을 아들에게 말해줬다. 현재도 과거의 계급이 그 형식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많이 비약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표현도 해줬다. “아버지가 현대 방계일가의 가장 막내 머슴으로 들어갔던거고, 그 회사의 대표이사는 조선시대 권세가의 청기지쯤 되는 위치란다.” “그 조정.. 2023. 11. 4.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못 살수 있다던데(2) 지금 우리 아이들의 세대를 보면 초등학교는 시험이 없어지고, 중학교에도 자유학기가 도입되어 아이들의 공부에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추후 이야기할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세대로의 시프트(Shift)가 이루어지는 시대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세대는 바로 386세대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297세대정도 되는 가보다. 이제 69년생 형님들 세대가 50대로 접어들었으니 70년대생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동시대를 살아감은 분명하다. 이 386세대에서는 유독 개천에 용이 난 경우가 많았다. 현 정부의 실세도 386세대로 채워졌다. 요즘 말로 흙수저가 금수저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던 교육시스템이었다. 많은 학생들 중에 총명한 머리를 가진 아이들을 배출해 사회를 끌어가는 엘리트 교육이.. 2023. 11. 3.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못 살수 있다던데(1)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1980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가지고 있는 입학사진은 칼라사진이었고, 가슴에는 손수건을 옷핀으로 부착했다. 내 얼굴은 엄청 일그러져 있었다. 어머니가 눈꼽을 뗀다면 침 바른 손으로 눈을 찌르셨다. 얼굴이 빨개져서 울고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당시 한 반의 인원은 60~65명 정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오후반으로 나눠서 학교에 등교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외자식이 귀한 시기였고, 기본이 두 명, 많게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있던 시기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500원 주화를 없는 형편에 억지로 샀던 기억이 난다. 바로 5공화국 출범 주화였다. 어린 시절 너무나 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장롱속에 보물처럼 넣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23. 11. 2.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이들(최종) 1980년대 당시 짜장면 한 그릇값은 500원이었다. 아버지 월급날이면 항상 어머니에게 월급 봉투를 내미셨다. 지금 공개하자면 내 어린 기억에 40 ~ 50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항상 봉투에 내역이 적혀 있었고 동전까지도 월급 봉투에 담겨져 있었다. 짜장면을 먹는 날이었다. 당시 짜장면 집은 유일하게 한 곳이 있었고 곱빼기를 간절히 먹고 싶었으나, 아버지외에는 곱빼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장롱 속에 아버지 월급 봉투를 찾아보는 것도 어린 나의 즐거움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창 배고팠던 시절이였다.. 전쟁세대도 아닌데 왜 항상 배가 고팠는지 폭식을 해서 초등학교 때는 살이 많이 쪘었던 시절이였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가는 것이 생활패턴 이였다. 어머니를 따라서는 7살 때까.. 2023. 11. 1.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이들(3) 중학교 1학년이 된 막내는 요즘 농구에 빠져 산다. 6학년을 지나며 키가 갑자기 10cm이상 커져버리자 농구에 눈을 뜬 것이다. 한창 농구를 좋아하는 아들을 보니 1983년 시작한 농구대잔치가 떠올랐다. 군부 정권 시대에 프로야구가 개막이 되었고 겨울철에는 농구대잔치가 시작되었던 것이였다. 이름만 들어도 한국농구의 전설들이 당시에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이충희, 김현준, 허재, 김유택, 한기범 선수등이 당시 브라운관 스타였다. 이후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이상민 선수등이 계보를 이었다. 대기업에 입사한 나는 당시 현대농구단의 후신인 농구단을 인수하면서 당시를 더욱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응답하라 1988’을 기점으로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 복고는 유행처럼 번졌다.. 2023. 10. 30. 이전 1 ···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