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가 내 부모님의 전성기였다. 2018년 여름은 가히 기록적으로 폭염이 이어지며 가장 높은 온도가 39.6℃에 이르렀고 1994년도의 기록을 깼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기온을 기상청 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최고 기온은 30℃를 넘지 않았고 평균기온도 25℃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름만 되면 여름 휴가를 떠났다. 아~ 더워 죽겠다면서..... 피서를 떠날 때는 항상 외가집 식구들과 떠나곤 했다. 어머니 형제가 8남매이다 보니 형제간에 우애가 남다르셨던 것 같다. 그 중에 이모가 두 분 계셨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역시나 휴가철만 되면 함께 피서를 떠났다. 1980년대는 자동차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내 부모님을 포함해 친지 분들도 자동차를 소유한 집이 없었다. 574번 버스를 타고 동대문에서 내려서 상봉동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 가평에 가는 버스를 타고 대가족이 이동을 했다. 우리 집 세 식구, 큰 이모 네 식구, 작은 이모 네 식구, 외삼촌 등 최소 10명 이상이 움직였다. 텐트는 기본으로 짊어지고, 코펠하고 배낭을 가지고 버스를 5~6시간 타고 도착하는 곳이 피서지였다. 지금 같으면 그건 피서가 아니라 고행길이나 다름없었다. 고속버스는 또 좌석이 없었다. 항상 입석으로 사람이 구겨져서 들어간다는 표현이 맞다 싶다. 짐과 동일하게 구겨져서 타고 가다보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험을 하게 되었었다. 또 한 번은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강원도로 피서를 간 적이 있었다. 기차의 위엄은 대단했다. 버스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기차는 만차의 개념이 없었다. 외삼촌들은 기차 창문으로 승차했고,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안쪽에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기차에 거의 매달려 가다시피 피서를 떠났다. 아찔했던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피서를 가거나 집안 모임을 하게 되면 항상 화투를 치곤 했다. 민화투, 고스톱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 나는 방학 때만 되면 친구 집에서 화투 놀이를 했다. 초등학생인 나의 실력은 성인이 된 지금보다 훨씬 잘했던 것 같다. 서당 개 3년이면 라면을 끊인다고, 6년 내내 친지들의 화투판 옆에서 배웠던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곤 했다. 지금은 온라인 게임이 지배하고 있지만, 당시 어른들의 놀이 문화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초등학교 당시 친구들도 나름대로 모두 화투룰을 알고 있었고, 조금씩 다른 룰을 시작 전에 맞추면서 서로 우기기도 많이 했다. 작은 돈이 오고 가며 부부싸움도 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좋은 기억들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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