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의 아버지가 40대 때는 정확히 1980년대였다. 어릴 적 살던 동네 이름은 새마을 이었다. 바로 옆 동네는 개미마을이라고 불리었다. 행정구역상 두 마을 모두 지금의 거여동, 마천동지역이다. 내 마음의 고향인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서울이라고 한다. 당시 지형상 남한산 밑 부분이며 산에 둘러쌓인 곳이라 동네사람들끼리 거의 알고 지냈던 곳이었다. 쌍문동의 1988년 생활상을 담은 ‘응답하라 1988’는 그 시절을 너무나 똑같이 재현해 내어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1988년 당시에는 내가 중학생 시절이였지만, 내가 보던 관점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전성기 시절이였다. 덕선이와 그 친구들이 주인공이긴 했지만, 성동일 배우와 이일화 배우등의 모습이 그 당시의 보통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극중 인상 깊었던 내용은 성동일, 이일화 부부가 집주인인 김성균, 라미란 부부와의 관계였다. 아이들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장면등이 지금 세대와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마당이 있고 마당 앞에 세 집이 같이 살았고,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집주인 집이 있는 구조였다. 세들어 살고 있는 세집은 모두 단칸방이었고, 지붕은 슬레트 지붕이었다. 우리 집은 가운데에 위치하였는데 왼쪽 집은 누나들이 세 명있는 집이었고, 오른쪽은 나보다 어린 남매가 같이 살았다. 마당 건너편에는 흔히 말하던 푸세식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이렇게 세 집은 모두 친척보다 더 가깝고, 속삭이는 모든 말까지도 다 공유할 수 있는 집이였다. 지금은 개인 프라이버시등이 존중되는 시기이나, 당시는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옆집에 반찬이 뭔지, 옆집에서 무슨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등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서면, 그야말로 정겨운 풍경의 연속이였다. 대문 앞에는 쌀집 할아버지가 항상 노란 콩을 쏴아~쏴아~ 채로 거르는 광경이 펼쳐지고 리어카 행상들이 핸드벨을 울리며 지나가고, 몇 세대 건너에는 담벼락에 붙어있는 시멘트로 된 쓰레기통, 전기줄을 늘어뜨린 전봇대에는 참새와 제비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또 당시에는 프로야구가 개막한 시기라 동네마다 편을 만들어 야구시합을 많이 했다. 지역이 서울인지라 당연히 난 MBC 청룡의 팬이었다. 우리동네는 청룡과 오비(지금의 두산 베어스)팬으로 양분되었다. 청룡의 백인천 선수, 오비의 박철순 선수는 이름만 들어도 대스타였고, 초등학생이였던 나는 경기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주말마다 야구 TV를 시청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였다.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가져보는 게 소원이였던 당시지만 어렵게 조르고 졸라 비닐 글러브를 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야구 글러브를 길들이기 위해 잘 때마다 베게 밑에 넣고 자곤 했다. 일주일 정도 그렇게 하고 나면 딱딱했던 글러브가 말랑해지고 캐치도 수월해졌었다. 운동은 항상 잘하지 못했지만, 야구만큼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도 초등학교 시절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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