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초, 받았다. 암 선고를
처음에는 당뇨인 줄 알았다. 당 수치가 300을 넘고 몸이 침대로 파고 들어, 일어나는 것 자체가 힘들었었다.
그리곤 암 덩어리가 혈관을 막아 혈전이 생겨 요도를 막았다.
2016년 7월의 하늘은 너무나도 파랬다. 눈이 부시도록 파랬다.
암선고 직후 나는 아라뱃길의 바다 줄기로 차를 몰았다.
한없이 푸르른 나무잎과 더없이 파란 하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구나 했다. 당시 내 나이 44세였다.
큰아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아직 둘째, 셋째의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였다.
나의 아내는 늘 분주하고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순수한 사람이였다. 물론 지금도......
이제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인생에 대한 서러움도 원망도 회한도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맞았다.
그런 감상도 잠시 지옥같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원 링겔 바늘이 마치 지옥에서 고문 받는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 였다.
수술일이 다가 올 수록 아내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내의 성격을 알기에 참 신기했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나에게 아내가 한마디 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라면만 끓여줘서 이렇게 됐나봐 ㅠㅠ"
혹시 모를 나의 마지막에 귀전에 들리던 아내의 말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수술장에 들어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었던 수술은 잘 끝나게 되었고 항암도 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2개월 가량이 나에게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 그날일지도 모르겠다.
20대 이후 처음으로 몸무게가 80kg 아래로 떨어졌던 시기였다.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아니 다시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8년이 흘렀다.
나는 골프를 배웠고, 일도 확장했고, 아이들과도 더욱 친밀하고 따뜻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아내와는 늘 함께 하며 전세계를 여행하며 살고자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ㅜㅜ
몸에 무리가 빨리 오는 것을 빼곤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남길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성공과 출세, 인정받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난 더욱 내 삶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삶에 대해 겸손하며,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에 대해 엄격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엔,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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